길게 늘인 짧은 이야기

죽음7

낮은담☆ 2007. 12. 26. 19:34

일곱 번째 죽음은, 삶에 교만해진 나에게 각성을 요구하며 심야의 벨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정적을 흔드는 벨 소리가 적절한 형용사를 떠올리지 못하고 단어의 배열을 몇 번인가 바꾸면서 한 문장과 씨름을 하고 있을 때 경기중단을 알리는 신호처럼 울렸다.

 

은희가 20여분 전 어머니에게 목서방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청하는 전화를 했을 때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을 했던 터라 두 번째 울리는 전화벨은 차라리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다.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어올리자 화급해 하는 은희의 목소리가 수화기가 미처 귀에 닿기도 전에 퍼져 나왔다. 아. 내입에서도 거의 동시에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오빠. 지금 바로 어머니 모시고 세브란스 응급실로 와주세요.

-응급실로 실려 간 거니? 알았다. 바로 가마.

은희도 그랬지만 나 역시 답을 기다릴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 놓으며 당신의 사위를 위해 기도 중인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빨리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왜?

어머니는 닥쳐 온 재앙을 믿고 싶지 않다는 어조로 반문을 했다.

-목서방이 응급실로 실려 갔데요.

 

가급적, 억양의 변화를 억제하며 심드렁한 척 말한 건 어머니가 받아들일 충격을 덜어드리며 자신을 진정 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어머니는 자리에 앉자 이내 두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으셨고 나는 차의 움직임을 본능적인 반응에 맡긴체 예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뒷처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의료진의 움직임은 침착하고 능숙했다. 까치발로 넘겨다 본 칸막이 너머의 핏기가신 목서방 얼굴이 낯설게 여겨졌다. 기도에 카데터를 밀어넣고 인공호흡을 하는 손과 심장을 맛사지해 대는 손놀림은 규칙적인 리듬을 타고 있었다.

 

땀범벅인체 집요하게 회생 시키려는 인술을 거부하는 듯 창백한 얼굴은 동공마져 풀려 있었다. 운명했구나. 그러나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의사가 동생을 향해 말했다. 도착했을 때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 한 번만... 한 번만 더 부탁드릴께요. 가슴에 맺히지 않게 딱 한 번만 더요. 알겠습니다. 한번 더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무게에 눌렸던 탓이기도 했지만 당장 그의 죽음이 몰고올 슬픔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손놀림이 다시 분주해졌다. 투명한 앰플속의 액체가 주사기로 옮겨지고 액체는 다시 링거에 연결된 가느다란 고무호스를 통해 이미 멎어버린 심장을 향해 주입됐다.

 

입언저리의 혈흔이 창백해진 입술과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야. 이쯤해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아. 저런 움직임들이 슬픔까지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건 아냐. 우리가 죽음을 슬퍼하는 건 두려움때문이야. 죽는다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거라구. 목서방의 얼굴, 평화로운 모습이야. 그는 오래전부터 자기의 죽음을 인정해 왔던 거야. 아버지의 얼굴이 그랬어.

 

의사들의 성스러운 손놀림은 오래지 않아 내 바램대로 중단되었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죽음을 확인하는 의식을 치뤘던 것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동생의 눈치를 살피며 드러내놓고 울지 못하셨으나 동생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도 기도중에 변을 당한 게 축복이어요. 갑자기 목이 메인다고 했어요.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어요. 구급차가 10여분 지체를 불렀는데 조금만 빨리 왔더라면... 하나님 뜻이었겠죠. 동생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보호자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영안실 직원입니다. 좀 도와주셔야 겠습니다.

-제가 도울 일이?

-고인을 영안실로 모셔야합니다.

 

고인.. 고인이라는 말이 금속성의 섬뜩함으로 울대를 통해 재생되고 있었다. 고인...그것이 목서방의 이름이었던가? 고인이라는 명사가 그의 이름을 수식하게 되었단 말이지? 하얀 시트에 덮힌 '고인'을 옮기기 위해 침대로 다가섰을 때 현기증이 일었다. 아, 이건 배멀미가 아니야.

 

허우적거리며 내짚은 손으로 갓 호흡이 끊긴 돼지를 만질때 느끼던 물컹한 촉감이 전달됐다. 그때처럼 생명이 끊긴 고깃덩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회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도 두려운 생각을 했다. 주검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주검과의 인연을 함부로 끊지 못하고 은영중에 삶에 애착을 갖는 내가 더 두려웠다.

 

죽은자가 소생한다면 그건 신의 실수라고 생각하곤 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신의 실수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 아니던가 말이다. 나는 한번도 신의 실수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실어나르는 침대의 비틀거리는 움직임에 화답하는 것일까. 침대에 실린 그의 팔과 다리가 여전히 출렁거렸다. 침대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요. 천천히 갑시다. 잠들어 버린 그를 깨우게 될것 같은 조바심으로 나직히 소리쳤다.

 

3년 전 치루었던 외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했다. 외할머니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우리가 자기 모순을 버리지 못하는 것, 얽히고 설킨 애증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것, 주어진 삶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탄생의 조건인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함 때문이야. 몇 해 동안 나는 겸허 하려고 하지 않았어. 삶에 불만을 품어왔던거야. 어느 사이에 마음속에 탐욕의 가지가 잎을 내고 있었던 거야. 뒤쪽으로 방향을 조금만 틀어주세요. 영안실 직원의 목소리가 마른 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냉장실의 문이 열렸다. 목서방은 두꺼운 단열재로 둘러 쌓여 현실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 좁은 공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얼굴은 어둠과 냉기 속에서도 여전히 평화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트를 벗겨냈을 때 드러난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미소는 생각처럼 환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슬퍼해야 한다는 학습된 관념이 일그러진 어설픈 미소를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냉장실의 문이 닫혔다.

 

저 얼굴, 염습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볼 수 없게된 얼굴.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자기 신에게 치유시켜 주기를 간구 했던 하루 하루의 삶을 버거워 했으면서도 자기의 신앙을 잃지 않던 저 얼굴은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처럼 기쁜 얼굴로 자기의 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거야. 목서방. 그분을 뵙거든 나도 그분을 향해 돌아가는 중이라고 전해주게.

 

독백처럼 중얼거리며 쉬 돌려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겹게도 달라붙을 탐욕과 욕정의 세계를 향해.

 

일곱번째 주검은 삶에 겸허해지라는 질타와 함께 또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내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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