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누드 2008

낮은담☆ 2008. 8. 11. 18:58

임해훈련을 몹시 두려워 하고 진저리 쳐댔던 까닭도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한강 너비 쯤은 쉬 도강할 수 있었으면서도 물속에 들어가기를 고통스럽게 만든 그 사건은 여덟살 나던 해 여름에 일어났었다.

 

여름방학 중의 하루, 원주의 어느 개울로 물놀이 가는 동무들을 따라 나섰다.

물장구 치는 법 조차 익히지 못했던 꼬마는 물가에서만 놀겠다던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급류에 휩쓸리는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

 

죽나보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코로 목으로 넘어들어오는 개울물에 숨이 막혀 의식이 몽롱해질 부렵 강력한 힘을 지닌 손 하나가 꼬마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끌어 당기나 싶더니 어느새 굵은 팔에 안겨 자갈밭에 눕혀졌다.

 

손의 임자는 물을 들이마셨던 구멍으로 다시 물을 토해내는 것을 지켜보았던 것 같고  의식을 온전히 되찾은 꼬마가

눈을 떴을 때  가볍게 웃어주었던 것 같았다.

 

그 꼬마를 익사 직전에 구해주었던 강력한 손의 주인은 내가 군복을 입게 되었을 때,  임해훈련을 떠났던 변산 해수욕장의

후미진 곳에서 잠재의식을 뚫고 불쑥 나타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상고머리였고, 가볍게 웃어주었던 그저 윤곽선만 살아있던 얼굴은  말하자면 그날 처음 반추된  기억속의 은인이었다.

그 뒤로 아주 드물게 한 번씩 떠오르는 얼굴은 눈과 코를 그려넣고 싶어도 반 백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껏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저, 그분이 당시에 고등학생이었을 것이라는 유추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별나게도 물놀이를 좋아하는 내 아들녀석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아이들 물놀이 갈 때마다 주의 단단히 넣어두라우. 너희 집안은 대대로 물에 빠져 가신 분이 한 분씩 계셨으니끼니" 하시던

숙부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머리칼이 쭈뼜해지며 그 분을 생각해 내려 했었지만 말이다.

 

 

시청앞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나서 속옷을 갈아입는 그때의 내 나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촛점창으로 데리고 들어온 아이를 조준하는 사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그분이 나타나셨다.

 

아주 짧은 순간, 눈섭까지 하얗게 변한 백발로 미소를 지어주셨지만 이내 제모습으로 돌아온 그분은 여전히

윤곽선 속의 희미한 모습이었다.

 

 

 

 

                                  

                                                                           

 

                                                                                                                                                  

                                                                            시청앞 잔듸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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