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두통이 멈추질 않는다.
틈나는대로 경직된 목근육을 주물러보지만 잠시 호전되는듯 하다가 여전하다.
혈액순환 탓일까?
못견디게 아픈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해 버리자니 자꾸만 신경을 건드린다.
타고난 술꾼은 못되어서 어쩌다 한 잔 마시는 와인병을 집어들었지만 격에 맞는 와인잔은 애초부터 없고
즐겨먹는 OST 치즈도 바닥을 본지 오래다.
몇 모금 홀짝거리자니 여러해 전 한동안 와인께나 축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시절에 와인과 다시 만나고 썼던 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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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처럼 다가온 와인과의 만남
보름쯤 전, 마트에 갔다가 파격적으로 라망이라는 이름의 국산 '레드와인' 한 병을 바구니에 넣고 나온 일이 있었다.
파격적이라는 토를 단 것은 평소에 술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내가 마실 목적으로 내 돈으로
술을 사 본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즈음 지독한 어깨통증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방금 같은 건물에 있는 한의원에 들러 부황이라는, 병든 피를 강제로
뽑아내는 시술을 받은 뒤 부식거리를 챙겨 가려고 지하마트에 내려갔었다.
몇 가지 필요한 걸 고른 뒤 잘 진열된 레드 와인 코너를 지나치며 문득 진홍색 와인이 조금 전 두 홉은 실히 되게
뽑아낸 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쪽 팔을 거의 쓸 수 없었던 나로서는 단단히 박힌 코르크 마개를 빼낼 재간이 없어 10여일을 모니터 옆에 눕혀
두어야 했다.
레드와인은 실온에 보관해야 하며 공기의 유입으로 인한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서 코르크 마개가 젖어 있게 눕혀서
보관해야 한다-는 설익은 지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워둔 병이 넘어지면 피가 쏟아질 거라는 가당찮은 생각 때문이었다.
어제 나는, 마침내 한 잔의 포도주를 입으로 옮겨버리고 말았다.
미세하게 새콤하면서도 쌉쓰레한 맛이 그윽한 향을 안고서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심호흡을 했을 때 와인의 향은 뱃속으로 밀려들기를 맹렬히 거부하고 강한 탄력으로 튕겨나와 코를 자극했다.
여운을 남기는 뒷맛은 브랜디에 뒤지지 않았다.
와인의 맛을 천천히 음미해보는 게 거의 20여년만이라는 계산을 했다.
참 좋다.
잊고 살았던 한잔의 와인이 나를 기쁘게 한다.
말하길, 맥주는 목구멍으로 마시고 위스키는 혀로 마시며 브랜디는 코로 마신다고 한다.
이제부터 나는 와인을 눈으로 마셔볼 작정이다.
투명한 와인 잔에 담긴 진홍색 액체를 함부로 입에 쏟아 붓는 건 차마 못할 일이다.
눈으로 색을 즐기고 눈으로 맛을 느끼며 눈으로 취하는 법을 터득해볼 생각이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와인을 비워야 할지 몰라도 나, 와인과 열애에 빠지게 됐음을 고백한다.
한잔의 와인, 우중충한 내 삶에 매력적인 여인처럼 황홀하게 다가온 신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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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삶이 우중충한 건 여전하다.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내가 좀 두려워하는 것 같다.
큰 병에 들었다는 말을 듣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