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5월, 아카시아와 실락원

낮은담☆ 2008. 5. 15. 21:57

 

처음 그 마을을 찾던 날은 아카시아가 절정이던 5월 중순이었다.

꽁무니에 흙먼지를  매달고 비포장도로를 심하게 요동치며 달리던  버스에서 내렸을 때 나는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먼지가 걷히길 기다렸다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몇 걸음 내딛자니 제법 물살 센 개울이 나타났다.

초행길이면서도 습관이듯 개울가로 내려서서 얼굴을 닦고  발을 담근체 심호흡을 쉬자니 그때까지  의식하지 못한

강한 향이 들숨에 빨려들어 왔다.

 

익숙한 향을 좇아 고개를 돌리니

폭 50여미터,  길이 7~800미터 족하게 개울을 따라 늘어선 아름드리 아카시아나무 숲이 보였다.

허리춤을 충분히 적실만큼 깊고 맑은 개울과 아름드리 아카시아 숲, 기막힌 조화였다.

 

사경을 헤멨을만큼 심한 장염으로  몸 가누기조차 벅찬 상태였지만 맑은 공기에 묻어 들어온 아카시아 향은 그순간

회생의 묘약인듯 영험했다.

 

열흘 남짓 아버지께서 손수 달여주신 탕약을 먹으며 원기를 되찾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개울가로 나가 아카시아

향에 젖어들곤 했다.

35년 전에...

 

그 4년 뒤, 군 복무를 마치고 바로 그 개울에서 모래와 자갈을 퍼날라 축사를 짓고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열정만 앞세운 무모함으로 혹사당한 허리 수술을 했고 "빨간 예쁜 벽돌집"을 꿈꾸던 그애와의 갈등은 내 등을 떠밀었다.

 

5월이 되고 아카시아가 피면 개울과 숲은 동화처럼 피어오르며 내게 손짓을 해댔다.

고향인듯 그것을 늘 그리워하던 나는 26년 전인 82년 5월 마침내 그곳으로 돌아가 정착을 시도했다.

 

그러나 개울은 서서히 말라갔고 야금야금 파헤쳐지던 숲이 망가지기까지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내 삶의 실타래도 서서히 엉키기 시작했고 그 마을은 인연을 맺은지 고작 20년만에 실락원이 되고 말았다.

 

배꽃이 피고 아카시아가 필 때면 나는 습관처럼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봄은 내게 알싸한 추억뿐이다.

그리고 올해에 또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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