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는 이야기

밤열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하다

낮은담☆ 2007. 8. 29. 00:25

비오는 밤바다.

간이역.

일출.

 

이런 낱말들이 머릿속을 휘젓더니 갑자기 떠나고 싶게 한다.

그래 가자.

이 우중충한 방구석을 잠시라도 벗어나보자.

 

그새 어둠이 깔리고 추적거리는 골목길을 벗어나며 이정하시인의 '비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4'의 마지막

연을 -제대로 기억하는 유일한 귀절인- 웅얼거린다.

 

-이제는 정말 외로움과 동행이다.

 열차는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떠나고 없었다.

 

평일이지만 서서 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 예매하고 떠나길 잘했다.

서울을 벗어나며 시작된 단조로운 밤풍경과 열차의 규칙적인 흔들림이 눈꺼풀을 끌어내린다.

 

자다깨다를 반복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열차만큼 부지런하지 못했다.

여섯 시간, 게다가 20분 남짓 연착이다.

기차로는 처음인, 어둠이 꼬리를 말기 시작한 정동진의 풍경이 새롭다.

 

 

역사를 빠져나와 해변으로 눈을 돌리니 식상하기까지 한 썬크루즈가 보이고

비는 멎었지만 흐린 하늘은 일출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다.

 

 

 

흐린 수평선 가까이 오징어잡이 어선 한 척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파도소리가 실루엣 한 쌍의 달콤한 소근거림처럼 들려온다.

하늘 한 쪽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하지만 구름의 두께가 여간한 게 아니다.

 

 

 

이쯤 불끈 솟았을 해가 아직도 구름 뒤편에서 유유자적이다.

아쉽지만 어쩌랴.

일출 또는 일몰을 본다는 것은 로또만큼의 행운인 것을...

딱 한 번 보았을 뿐인 영해 일출의 웅장함이 17년 전의 기억 속에서 꿈틀 거린다.

 

 

 

 

 

뒤돌아서서 지나온 길을 본다.

삶의 족적인 양 휘고 구부러져 있다.

 

다시 걸음을 옮길 때 동네아주머니가 말을 건내며 손가락질을 한다.

"아저씨, 저기.."

가르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나 여기 있다."

그분이 일출시간에서 20분이 지나서야 도도하게 얼굴 내민다.

 

하이고, 이제 나오시네요. 그 동안 잘 지내셨죠?"

"그랴, 너두 밸일 읍쟈?"

 

금빛 출렁이는 바다.

잔잔한듯 하면서도 에너지 넘치게 모래턱을  치고 들어오는 파도.

 

 

숨을 길게 참았다가  깊은 들숨을 쉬어본다.

시원한 새벽공기가 아랫배까지 밀고 들어온다.

아, 이 개운한 아침...

 

 

 

기적소리가 들렸다.

저 기차를 타야했는데...

두 시간이 생겨버렸다. 

 

"나에게 53분의 여유가 있다면 우물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갈 텐데..."

어린왕자는 그렇게 말했었지. 

그래, 시가지를 둘러보자.

 

 

느릿느릿 들어선 시가지는 둘러보고 자시고할 것도 없는 손바닥만 한곳이었다

 

 

역으로 되돌아왔다.

플랫폼에 들어서면 바다가 반겨주는 곳.

경복궁의 정동향에 있다고 해서 정동진이라나...

정동진역이 아름다운 것은 바다가 훌륭한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기차가 도착했고

 

 

 

 

 

창너머를 겨냥해 들이민 렌즈를 통해 정동진의 팻말이 잡히나 싶더니 어느새  끝자락으로 밀려난다.

 

기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기차도 나도 바다를 데리고 간다.

 

갑자기 내가 커보였다.

세상이 넉넉해졌고

때로 때때로 사는 게 지루하다던 투정이 바다속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또 오련다.

지칠 때, 지루할 때, 힘들 때면 너를 생각하고 그리움이 커질때마다 다시 오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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