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여의 시차를 두고 고인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조카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미처 감기지 않은 아버지의 눈꺼풀을 쓸어내리던 그 아침이 벌써 24년하고도 두 달 전이었습니다.
그새 당신의 아들이 초로의 나이라니 세월 참 무심합니다.
20년 동안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저 간간히, 연기처럼 올랐다 사라질 뿐이었는데 4~5년 전부터 부쩍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올해 들어서, 기일을 전후해서는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냥 마음속으로 자책만 하던 일이 회한이 되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갑니다.
‘증오와 용서와 화해’를 생각하며 내 마음을 열어젖혀 보기도 했지만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아버지가 더 그리워지기만 합니다.
아버지.
제가 성장하면서 제일 듣기 싫었던 두 마디가 있습니다.
“지 애비 닮은 놈”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해보지 않았으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경외심을 한 번도 흐트러 본 일이 없었으면서도, 그 당시에는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했으면서도 그 두 마디가 왜 그리 듣기 싫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도 많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어제 친구에게 아버지를 평점한 일이 있습니다.
남편으로의 아버지, 내 혈육으로의 아버지, 남자, 또는 인간으로의 아버지에 대한 평점은 각각 2.5. 3.5 9.0이었습니다.
그래요.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는 참 멋있고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곧고, 바르고, 불의에 굴하지 않았고, 사심 없는 의리의 사나이였고 종교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원망하고 극도로 증오했던 것은 아버지를 인간으로 평해보기 이전의 일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혈기방장했던 20대 때의 제 모습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곤 합니다.
아버지를 넘어서려고 했고 구닥다리로 몰아붙이며 애써 무시하던 방자함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곤경에 빠트리고 통쾌해 하기도 했으니 세상에 그런 무지한 놈이 또 있겠습니까?
아버지.
내가 아버지의 진정성을 인정해드리고 심한 불효를 저질렀음을 자인하던 순간이 그 아침입니다.
온기가 그래도 남아 있었고, 오수를 즐기실 때처럼 실눈을 뜨고 영면하신 그 모습 때문에 소천하심이 믿기지
않았을 만큼 평화롭고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눈을 쓸어내리던 그 아침의 그 순간이었습니다.
“시계가 멎었구나.”
잠자리에 들기 전, 문안인사 드리러 안방으로 건너갔을 때 아버지가 제게 하셨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젠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아요. 너무 오랫동안 미워해왔는데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사랑해요.”
저는 벽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이 입술을 뚫지는 못했습니다.
“내일 맑은 정신일 때 이 말씀을 꼭 드려야지...”
그렇게 여섯 달을 미루어 온 말을 꺼냈다 다시 접어 넣으며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씀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그때 아버지는 심지가 거의 타버렸음을 알고 있지 않으셨던가요?
멎어버린 벽시계를 바라보며 그 밤이 아버지의 마지막 밤이라는 걸 예견하지 않으셨던가요?
진즉부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지 않으셨던가요?
“나 내일 간다...”
그리 한 말씀만 하셨어도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을 시간은 충분했는데요.
아버지.
왜 이렇게 보고 싶습니까?
오늘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 끝내는 눈물샘이 터졌습니다.
왜 삶은 늘 이런 식으로 우리가 후회하도록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정말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아버지......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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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용서와 화해”
[세월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상처를 남기며 지나갑니다.]
내 예전 홈피의 어느 귀퉁이에 적어넣은 말이다.
[세월은 무섭세 빠른 속도로 상처를 지우며 지나갑니다.]
누군가가 그말에 대한 댓귀로 남기고 간 말이다.
[상처를 지워주는 세월은 어디서 팔던가요?]
댓귀의 주인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겸해 던진 말이었다.
댓귀의 주인이 말했다.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던 누군가를 용서하고나니 세월이 무섭게 흘렀더라]는 의미의 말을.
죽이고 싶다는 말속에는 능동적인 살의보다는 저주하고 싶을만큼 증오스러운 대상이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공간으로 옮겨지길 바라는 수동적인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용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를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은 고통이다.
그 고통은 마침내 자신을 향해 증오의 칼날을 들이민다.
오랜 세월 그에게 저주마저 서슴치 않았다.
아들을 낳고 녀석의 볼에 입술을 부벼대다 문득 그를 용서해야겠다는생각을 했다.
그에게 남은 삶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하고 그의 곁으로 갔다.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여섯달 동안 그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시계가 멎었구나."
벽시계의 태엽을 감아주며 바라본 그의 눈은 생기를 잃고 있었고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당신을 많이 미워했어요. 지금은 당신을 용서했지만요.
그러나 여전히 입안에 갇힌채 였다.
다음날 새벽.
그의 눈을 쓸어내려야 했다.
끝내 그와 화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긴 시간 그를 증오 해왔음을 고백했어야 했고 그를 증오했다는 사실을 용서받았어야 했다.
서로 용서해줄 때 진정한 화해가 성립된다.
새로운 증오가 생겼다.
그와 화해할 수 있었던 기회들을 놓쳐버린 자신을 증오하게 되었고 스무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다음 생에서나 가능하리라.
200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