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어느날 창덕궁, 해가 기울던 무렵 회빈루(혹은 보춘각)을 둘러보던 중 담았던 그림입니다.
빈집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 때문이었을까요?
조선왕조 말기에 횡행했을 음모의 비릿함이 셔터를 누르는 동안 코끝을 자극하는 것 같은 음산함을 느낀 까닭은.
대선 개표방송을 지켜보기 위해 몇 명의 지인이 인천 차이나타운의 한 주점에 모여 앉았습니다.
우리가 지지했던 후보의 낙선은 오래 전부터 예견 되었기에 우리의 관심은 당선자의 득표율이었지만
막상 발표된 출구조사는 믿기지 않을만큼 허탈했습니다.
"48%에 들지 못한 우리는 좃나 부끄러워 해야 하는 거지?"
그렇게 주절거리던 내 머릿속을 �금없게도 이 그림이 스치고 지나 다음날 블로그 한 켠에 올리기도 �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잘해주길 빌어주는 일 밖에 없겠군. 잘하지 않으면 국민이 고통을 받게 될터이니...'
그 말에 모두 공감하며 술잔을 털던 게 여섯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제 저녁, 서울역쪽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습니다.
종로를 지나 광화문, 서울역을 경유하는 버스였지만 중앙극장 앞에서 회차하는 바람에 명동성당을 지나 한국은행앞길로
방향을 잡고 올라가다가 중앙우체국 앞에 앉아 잠시 쉬는 사이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저 몇 천명쯤 지나려니 했던 행렬의 규모는 언론매체들이 15~20만으로 추정할만큼 엄청났습니다.
익숙하게 경험해온, 운동권이 주도하던 7~80년대의 거리 시위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어느 배후세력이 아버지와 아들의 동반을 부추겼을까요?
어느 불순세력이 100일 맞이 아이를 아웃 시키려고 이 많은 인파를 동원했을까요?
공공의 적을 향한 분노를 속으로 삭이는듯 심각한 표정의 시민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남녀노소가 한 무리로 엉켜있지만 차분하고 질서있게 움직였습니다.
DMB를 든 손 너머로 '미친소, 미친교육'이라는 글귀가 보입니다.
쥐잡는날.
누가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었나 싶었는데 쥐였나봅니다.
생쥐머리가 새우깡에서 발견되었을 때랍니다.
'아니, 어떻게 새우깡에 생쥐머리가 들어갈 수 있지?'하는 물음에
어느 누리꾼이 '청와대에도 들어가는 생쥐가 어딘들 못들어갈려구'라고 되받았답니다.
정말 대단한 해학입니다.
공공의 적에 대한 분노, 미친소에 대한 두려움은 아이라고 다르지 않나봅니다.
'아빠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자리 만들어 주셔서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요?
아빠에게 안긴 아이가 시선을 주는 저곳에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미래가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이 광경이 아이 머릿속에 교훈으로 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비장함으로 무겁던, 죽어도 좋다는 결연함으로 때론 섬뜩하던 그 시절과는 달리 가벼운 산책길에 나선듯합니다.
아, 그렇구나.
자기 주장을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성숙해진 사회가 이 많은 사람을 끌어모은 배후세력이구나.
손을 꼭 쥔 연인들도 한마음으로 걸음을 합니다.
아름다운 행진입니다.
어느 가족의 발걸음도 경쾌해 보입니다.
엄마가 밀어주는 유모차...
아빠가 밀어주는 유모차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시위 초기 경찰의 무차별 연행을 비꼬는 퍼포먼스까지 등장합니다.
웃으며 가볍고 경쾌한 걸음들이지만 부글거리는 속만큼은 유달리 불꽃 드센 저 촛불과 같을 겁니다.
행렬 첫머리에서 마지막 행렬이 지나기까지는 30분쯤 걸린 긴 행렬이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분노하면서도 그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웃으며 축제에 온듯 즐겨운 행보를 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묘안을 생각해낼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래하듯 외치는 구호, 저주와 악담의 말초적인 표현대신 하고 싶은 말을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킨 재치.
이런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을 아직도 계도하고 가르쳐줘야할 어엿쁜 백성으로 여기고 있는듯한 저!들이 가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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