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창 너머

구봉도의 그녀들

낮은담☆ 2009. 3. 16. 23:44

마땅히 야생화의 보고라는 P 아일랜드를 밟았어야 했다.

하지만 바다로 향할 때마다  하늘은 내 편이 되주질 않았다.

 

기행 하루전인 13일 내린 비가 뭉그적 거리며 자르지 못한 꼬리가 끝내 드센 바람을 일으키더니 14일, 청명하고 구름의 흐름도 여유로운 하늘과 달리

바다는 높은 파도로 일렁였다.

 

해서, 팔봉산행으로 대체해야 했다..

그러나 서해바다가 조망되는 해발 400미터도 체 안되는 야트마한 팔봉산을 점령한 바닷바람은 산행내내

돌풍에 버금가는 따끔한 맛을 인색하지 않게 보여 주었다.

 

하루 자고 나면 평정을 되찾으리라는 기대는 다음 날 이른 아침 출발하는 순간까지는 유효 했었다.

그러나 기행을 주선한 리더에게 걸려온 쾌석정 선장의 전화는 비관적이었다.

 

오전의 바다는 평온하지만 오후에 기상특보가 발효될 조짐이어서 항해가 불가능하단다.

쾌속정을 대체하고 싶었던 항해 가능한 유람선은 P 아일랜드 주변을 배회만 할뿐 접안은 하지 않는다는데야 어쩔 것인가.

 

가까운 영흥도 기행이라도 해야 한다는 중지가 모아져 일행은  구봉도를 거쳐 영흥도로 선회하기로하고 답사길에 올랐다.

 

육지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던 구봉도의 풍경은 어정쩡하게 다가왔다.

이 시기의 구봉도에서는 노루귀를 흔히 볼 수 있단다.

 

편안하게 경사진 산길을 한참 올라 활엽수림을 끼고 돌면서  겨우내 보고 싶어했던 노루귀가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추위에 몸을 떠느라 입을 닿은채로..

 

 

 

 

아침햇발을 받으며 낙엽사이로 고개를 삐죽이 내민 세 송이의 흰노루귀가 눈에 띄었다.

주위를 덮고 있는 낙엽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니 여린 소녀의 이불을 빼앗아 새벽잠을 깨우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기습적인 한파가 몰아치던 어느 초겨울에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추위를 이겨내려던 생각,  그때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던 Three Dog Night이라는 락 그룹을 끌어들여 묘사했던, 쓰다 중단하고 내 팽개쳐둔  글이 떠올랐다.

 

-- 이어지는 곡은 트리 독 나잇의 노래입니다.

    An old fashioned love song

   라디오에서 연주되는 오래된 사랑의 노래 처럼,

   그들이  결코 떠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음악과 어우러져 나와요...

   이종환의 해설에 묻혔던 노래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Three dog...  Three dog...

  그래, 에스키모의 겨울나기에서 착안해 지은 이름이랬어.

  보통은 한 마리의 개를, 좀더 추울 땐 두마리, 아주 추운 밤에는 세마리의 개를 끌어 안고 잔댔어. ---

 

 역광을 받은 세송이의 흰노루귀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솜이불을 뒤집어 쓴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서있는 것 같았다.

 

 

 

 

 

하얀색과 분홍이 공존하고 있었다.

망울을 터트리기 전의 꽃은 피어오른 꽃과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피어오른 매화보다 터지기 직전의 망울이 더 사랑스럽듯.

익스텐션 튜브의 단점은 정확한 촛점거리를 벗어나면 초점이 뭉게진다는 것이지만 그새 번들렌즈에 만족하던 올챙이 시절을 잊은 투정일 뿐이다.

 

 

 

 

 

너무 추워서일까.

분홍색 노루귀의 선명함 대신 창백함을 머금고 있다.

목이 꺾여버린 그녀가 머리를 치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듯 마음 아리다.

 

 

보호해주고 싶은 연약한 꽃들.

아무리 앵글을 낮춰도 하늘을 배경으로 그녀들을 담을 수 없을만큼 낮은 그녀들.

기껏해야 7~8센티에 불과한 낙엽속에 묻힌 그녀들은 조금만 한눈질을 해도 밟아버리기 십상이다.

 

 

 

 

 

정말 그리워하던 그녀, 복수초.

눈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노란 속살을 보여주는 그녀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때의 그 설레임.

 

그녀만 쫓아다닐만큼 여유롭지 못한 내가 이처럼 활짝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도 첫대면을 한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다.

 

하필 뾰쪽한 돌밭에 무리지어 군락하고 있어서 무릎 꿇고,팔을 몸통에 붙여 팔꿈치로 카메라를 지지하고 촛점창을 들여다보는 내내 압박하는통증때문에 담아내기 쉽지 않았지만 이런 고통마저도 즐거움이었다.

 

 

 구봉도의 산자고는 겨우 잎만 드러내고 있어 산자고와의 조우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영흥도의 어느 사찰 뒷산에서 체 수십송이에 미치지 못하고 한 곳에 한 두 개씩 모여서 끈질긴 명맥을 겨우 이어가는 그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을 만날무렵 화창한 햇발이 구름 뒤로  몸을 사리자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대상이 없어졌다는 시위인 양 한결 같이 입을 닫아 버린 뒤였다.

 

 

 

잎은 길지만 키는2~3센티미터도 안되는 꽃.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야 하는 꽃.

제법 센 바람이 불었지만 흔들림이 작던 꽃.

 

그들은 나에게 세파에 흔들리지 않으려거든 더 낮아지라고, 세상을 제대로 살려거든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라고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