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담☆ 2007. 8. 28. 19:53

 

 

오랜만에 늦잠을 즐겼습니다.

모처럼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며 한껏 여유를 부려봅니다.

 

그러나 이불속의 여유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진한 향의 커피가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죠.

 

주전자에 올린 물이 끓는 사이에 밀폐용기에서 덜어낸 한 스푼의 원두를 핸드밀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부드럽게 갈리는 촉감이 느껴집니다.

 

요즘 빠져들고 있는 케냐AA를 맨 처음 대했을 때 맛과 향을 느끼기기도 전에 벌써,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갈리는 손맛만으로도 그 존재가 내게 각인되었던 터입니다.

 

끓은 물의 숨이 죽는 동안 드립퍼에 필터를 깔고 짙은 암갈색의 원두를 조심스럽게 옮겨 담습니다.

그리고 주전자에서 쏟아지는 물이 최대한 가는 물줄기가 되게 물의 양을 조절합니다.

 

이때 내 머릿속은 거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이외수씨의 소설 한 대목으로 채워집니다.

어느 기름장수가 국자에 퍼 담은 기름을 아래층에 놓아둔 기름병에 옮겨 담는 대목입니다.

그날 부는 바람의 강약에 맞춰 실처럼 가는 기름 줄기를 정확히 병속에 떨구는 장면을 그려보며 드립퍼를 채우곤 합니다.

 

갓 갈아낸 원두는 물을 만나면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물 오른 소녀의 가슴처럼 봉긋이 부풀어 오릅니다.

 

코를 가져다 대봅니다.

그리고 들숨을 길게 쉬어봅니다.

기분 좋은 아침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머그에 채워진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들고 한 모금 머금어 봅니다.

오늘 하루도 이런 작은 행복의 알갱이들로 채워질 거라는 즐거움이 혀에 와 닿습니다.

 

그러고 보니 밀폐용기가 이내 바닥을 드러낼 것 같습니다.

생두를 꺼내 시원찮아 보이는 알갱이 몇 알을 골라냅니다.

 

1월 말쯤이던가?

케냐AA 생두 1 킬로에 3만원이 체 안 돼는 쇼핑몰을 발견 했을 때만해도 횡재를 한 기분이었는데 며칠 전 반값에

살 수 있는 곳을 알아냈을 때는 벼락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생두는 면세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한 움큼의 생두를 집어넣고 볶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오 분 남짓은 흡열이 충분해지도록 뜨겁게 가열해줘야 합니다.

 

손은 부지런히 팬을 움직이며 키질하듯 생두를 뒤집어줍니다.

연두색 생두가 노릇노릇 거리기 시작합니다.

 

오 분쯤 지나니 첫 번째 팝업(크랙이라고도 하는)입니다.

말 그대로 타다닥거리며 콩 볶는 소리가 팬 속에서 솟아오릅니다.

 

지금부터는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균등하게 볶아지지 않기 십상.

꾀를 부릴 겨를이 없습니다.

 

껍질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가스레인지 주변은 흩날리는 껍질로 지저분해집니다.

이쯤 잠간 불에서 내려 팬 속의 껍질을 조심스럽게 불어냅니다.

수분이 제거된 생두는 조금 센 입김에도 같이 날려 버리니 말이죠.

 

그새 또 오륙 분이 지났고 어느새 갈색으로 변한 콩에서 2차 크랙이 시작됩니다.

이제 불을 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아차 하는 순간 원두가 타버리게 되니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긴장한 채 시선을 고정하고 색깔의 변화를 지켜보며 연신 키질을 해댑니다.

 

베어 나온 기름으로 표면이 조금씩 번들거리며 익숙해진 색깔이 되었을 때 쯤 불을 끕니다.

이제 냉각단계입니다.

 

여전히 팬을 흔들어 주며 열기가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 혹시나 타버린 알갱이가 있지 않나 노려보기도 합니다.

타버린 원두 한 알갱이가 여남은 알갱이의 맛을 망친다는 엄포(?)가 전해지기 때문에 꽤나 신경을 썼습니다만, 오늘은

‘삼사십초만 덜 태울 껄’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로스팅에 관해서는 여기저기 자료 뒤져가며 독학으로 터득한,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솜씨라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만, 어쨌거나 일주일은 든든하게 되었습니다.

 

                                                                                                                                                                     2006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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