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에서 만난 어린왕자
태백산입니다.
전 날 눈이 내렸다고는 하지만 언발에 오줌 눗듯 찔끔 흩날렸을 뿐인 산아래의 을씨년스러움과는 달리
위로 오를수록 쌓인 눈의 두께가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감동없는 밋밋한 산행이 아니길 바라던 기우와는 달리 두껍게 다궈진 마지막 눈길을 치올라 가는 사이 후끈 달아오르는
체온조절을 위해 한 겹 벗어내고 경쾌한 마음으로 청량한 산공기를 들이쉬며 발을 바꿔 내딛습니다.
봄기운이 실렸을 거라고 얕잡아보고 허술히 차려입고 나선 2008년 2월 24일 태백산의 바람은 여전히 드셌습니다.
속옷이 젖으면서부터 목과 턱으로 밀려들어오는 날선 바람으로 체온 조절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정상에 가까워질 무렵 아빠의 뒤를 좇는 아이의 모습이 잡혔습니다.
힘들었을 법도 한데, 투정을 부렸음직도 한데, 아빠의 손을 잡고 묵묵히 뒤를 따르는 아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지나치지 못하고 구도에 신경쓸 겨를 없이, 아빠에게는 '어린왕자'임이 분명한 아이를 향해 셔터를 눌렀습니다.
마지막 고비다 싶은 급경사를 오르고 난 뒤 아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찬찬히 �어본 참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에서 아빠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멋적어서 렌즈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아이가 몹시 부러웠습니다.
뒤주속.
저수지.
우악스러운 힘만 기억속에 남아 있는 내 유년의 기억과는 달리 성년이 된 아이의 기억속에서는 묵묵히 자신을 이끌어
주시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과 믿음이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부러웠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자청했던 이유였습니다.
아주 나쁘지 않은 스킨쉽의 기억이래야 기껏 장마비가 잠시 멎은 그날밤 저수지 뚝에서 까실하게 자란 수염으로 볼을
부비던 기억이 고작인 내가 이 아이가 훗날 꺼내볼 수 있는 따뜻한 그림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겁니다.
방향이 같다보니 정상에서 이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어디 사는지, 이름도 나이따위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스치는 만남이지만 아이가 아빠를 바라보던 사랑스러움과 신뢰로 가득찬 눈길은 내 머리속에 오래 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 아이가 다 자란 후의 모습을 궁금해하기 보다는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는 게 훨씬 좋을 것입니다.
볼에 바람을 집어넣고 나름대로 포즈를 잡은 아이.
내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이와의 만남일터이고 이 아이가 내 얼굴을 기억하리 만무하지만
아이에게 선물을 하나 한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해서 이번 산행에서는 이 아이를 남기기로 합니다.
.
자칫 무덤덤할 뻔한 풍경 사이사이로 눈길을 당기는 삽화들이 박혀있었지만 비로봉이나 향적봉 만큼의 감흥은
일지 않았습니다
태백산의 주목들은 팔자가 좋은 걸까요?
시멘트로 속을 채우거나 철망을 두르고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런 풍경에는 눈길조차 주기 싫었던 것은 나의 유별남 때문이었을까요?
바람에 야금야금 흩어져버린 눈꽃을 잃고 칼바람에 알몸을 드러낸 정상부근의 황량한 나무가
삭막하기까지 했지만 그나마의 눈꽃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다시 겨울이 오기까지는 그리움 속에 묻어두어야 하겠기에 썩 내키는 각도는 아니었지만 조리개를 한껏 열고
렌즈 속으로 빨아 들였습니다.
'봄이 올 때가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따뜻이 덮어줄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안도현 시인의 시 한 귀절이 떠올랐습니다.
추녀의 휘어진 정도만 보고도 건축 연대를 알아내는 지식은 없지만 부드럽게 치켜 올라가는 선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잠시 풀렸던 날씨에 거의 녹아 내리고 안간힘을 쓰며 어렵게 매달려 있는 고드름이 애처롭습니다.
단군성전 앞에 장작더미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습니다.
북한산 진관사의 섬돌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고무신이 그저 전시용이라는 걸 알아채고 허탈했던 기억때문이었을까요?
한쪽만 허물어 쓰고 눈이 두텁게 쌓여있는 것을 보면서 애써 아껴쓰고 있나보다..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합니다.
귀가길의 버스 안에서 일몰을 맞았습니다.
바다에서건 육지에서건 맑고 붉은 일몰을 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서 결과가 뻔한 그림을 서둘러 담아보려고
하면서 유비무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해넘이 사진은 200미리 렌즈는 되어야 제대로 표현이 되는데 오늘 하필 챙겨오지 않았으니까요.
55미리 줌으로는 그냥 색상이나 즐길 뿐입니다.
이렇게 하루가 또 저물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