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과 사도세자 그리고 나
# 프롤로그
드라마 이산이 절정이다.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삼각고리는 권력 암투로 점철된 왕조시대 의 슬픈 단면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 사도세자 - 정조의 사이에 발생했던 한 엽기적인 사건은 내가 가장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는 트라우마, 즉 정신적인 외상을 입고 빠져들게 된 악몽이기도 하다.
도저히 잊을 수 없도록 강하게 박힌 지독한 악몽은 성장과정과 대인관계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습작시절의 [눈보라]라는 엽편에 털어놓음으로 왠만큼 극복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결론은 죽을때까지 품고 갈 수 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우리 세대의 상당수가 그랬지만 나는 하루 건너 한 번쯤의 심한 매타작을 당하며 자랐다.
매에 익숙해지면 맞는 순간만 지나면 그런대로 평온해 질 수 있지만 정신적인 공포는 파편이 오랫동안 제거되지 않는다.
오늘 방영된 드라마 이산은 특별편성 분이었던 가보다.
그동안 회상장면에서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던 장면이 오늘은 꽤 긴 분량으로 재탕 되었고 내 뇌의 다른 한켠에서는 그 끔직했던 기억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랫글은 진지하게 읽어주셔도 좋고 농으로 보셔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결코 농일 수 없는 기억의 한 단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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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속의 세자
맞아도 소용이 없는 아이였다.
죄 없이 맞은 매만 셈해도 중공군 일개 사단은 족히 해치울 만 큼을 맞고서도 꿋꿋이 자기 소신을 버리지 않는 별난 아이였다.
손가락 하나 스칠 기미만 보여도 '엄마! 아빠! 오빠가 때려...'하고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을 하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때문에도 질리도록 맞던 맷집 좋은 아이였고, 차라리 몽둥이로 뱃가죽을 단련 받았더라면 일찍부터 프로복서로 각광 받을 수도 있었던 운 나쁜 아이였다.
또, 부모님과 동생들을 모두 적으로 두었던 외로운 아이기도 했다.
외할머니만이 나의 유일한 방패막이였고 필요 할 때마다 나를 위기에서 구해 주시는 천군만마였다.
11살의 어린 세자는 그날도 매를 맞았다.
통신표때문이었다.
'수'로 도배된 성적에 으쓱 거리며 여동생의 성적표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여동생 은숙이는 두개가 찍힌 '우'에 속이 상했던지 성적표의 공개를 거부했고 옥신각신 하다 화가 치민 나는 겁도 없이 동생게게 꿀밤을 먹이고 말았다.
동생은 즉각 어머니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질렀고, 나는 '별도리 없이 벌어놓은 매, 이거나 먹어라'하는 맘뽀로 동생을 향해 쇠꼬챙이를 집어 던졌다.
쇠꼬챙이는 하필 동생의 눈누덩이를 명중시키고 말았다.
(그애의 눈밑에는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상흔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피를 본 동생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고 정해진 순서대로 나는, 신나게 맞고 하필 그날은 한 달만에 집에 들르신 아버지가 써비스로 안겨주신 보호감호 처분까지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힘이 장사였다.
한 손으로 나를 움켜쥐고 머리위로 들어올린 아버지는 "너는 이제 세상 구경 다한 줄 알라'며 나를 뒤주 앞으로 끌고 가셨다.
필사의 저항을 하였으나 당연히 아버지를 이길 순 없었다.
아버지를 이기게 된건 그날로부터 20년쯤 지난 뒤였다.
울었다.
외할머니를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그러나 그날의 외할머니는 있어야 할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의 호랑이같은(아버지는 함자도 범虎자외자를쓰셨다.)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는절대로 잘 못을 저지르지 않고 무조건확실히 잘하겠다고 애원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객관적인 분이어서 사사로운 정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셨고 다섯 가마쯤 들어 가는 뒤주에 나를 거꾸로 쳐박으셨다.
아직 햅쌀이 들어 차기엔 좀 이른 초가을의 뒤주 속은 묵은쌀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거꾸로 쳐박힌 내 입으로 쌀이 들어왔다.
심심할 때면, 간식 생각이 날 때면, 한 주머니 가득 훔쳐내 우 물거리던 고소한 생쌀이 모래보다 껄끄러웠다.
더이상 버둥거릴 겨를도 없이 뚜껑이 닫히고 말았다.
뚜껑위에 다듬이돌을 내려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못을 박는 소리가 이어졌다.
절망이었다.
뒤주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쳐 보았으나 밤나무를 두껍게 켜서 만든 뒤주는 끄떡도하지 않았고 바깥 세상과 나를 완벽히 격리시키는 본연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뒤주 속이 무서웠다.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외할머니를 따라가 구경한, 호환전쟁마마보다 더 무서운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화였다.
'뒤주속의 사도세자'라는 영화였는데 최남현이라는 원로 배우가 (그분을 꼭 한번 만나 뒤주 속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말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셨다.) 영조로 분하여 사도세자를 (아마 신성일 아니면 최하운(인지 운하)이라는 배우였던 것 같다. 이 분도 가능하다면 한번 만나 그때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뒤주속에 들어가게한 뒤 못질을 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굶주림과 갈증과 공포 속에서 죽어가게한 비극적인 영화였다.
두려워졌다.
영화 속의 영조보다 더 엄하고 권위있는(적어도 우리집에서는) 아버지가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하니 한없이 무서워졌다.
울고 또 울었다.
소리내어 울고 힘을 다해 울고 힘이 빠져 울고, 지쳐서 소리죽여 울고 말았다.
그래도 빛이 새어 들어 오는 틈새가 있었다.
동공이 어둠에 적응한 뒤부터 부연 빛이 보이더니 점점 안이 밝아졌다.
바닥에 깔린 하얀 쌀이 보였다.
좌우를 더듬어 보았다.
물컹한 것이 만져졌다.
홍시였다.
훔쳐 먹으려고 그렇게 뒤져도 찾지 못한 홍시를 뒤주에서 찾아냈다.
체념을 하게 되자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시를 먹었다.
와중에도 달콤한 홍시가 입안으로 쭉 빨려 들어왔다.
몇개를 먹었는지 배가 불렀다.
이내 졸음이 덤벼들었다.
이대로 잠드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졸음을 이겨보려 했으나 끝내 잠들고 말았다.
천사의 손길이라고 믿어지는 감촉이 이마에 느껴졌다.
하나님 앞에 불려온거라고 믿어버린 나는, 죽었다는 사실을 믿기 싫었고 정말 무서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세상에 있을 때 지은 죄들을 모조리 영화로 찍어 죽은 다음에 보여준다는 주일학교 반사님 말씀이 생각났고, 지은 죄가 다양각색이라고 믿었기에 영화를 볼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까칠하면서도 부드러운,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 외할머니구나.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한꺼번에 뜨지 못하고 실눈으로 할머니를 확인했다.
깊이 파인 주름에 쪽진머리를 확인하고 노여움에 울음을 터뜨리며 할머니! 라고 외치며
품으로 달려들었다.
진실로 구원 받았던 것이다.
---오냐 내강아지... 무서웠지야? 느그 압다리(아버지의 방언)는 으째 그모냥이다냐? 오메 짠헌 내강아지.
외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후, 천사라는 낱말 위로는 어김없이 외할머니의 얼굴이 입혀지게 된다.
다음날.
어머니의 고함소리에 지레 겁먹은 나는 뒤주속의 악몽을 생각하며 처음으로 도망질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하이소프라노가 내 뒤통수를 맹렬한 속도로 쫓아고고 있었다.
"누가 뒤주 속의 홍시 다 쳐먹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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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이 나이에 감상에 빠진다는 게 그리 잘어울리는 일은 아니다.
어제는 간헐적이긴 했지만 꽤 훌쩍거렸다.
한 친구의 트라우마를 -그는 다 극복한 일이라고 뒤에 말했지만- 알고 난 뒤부터였다.
물론 그때도 왠만큼 평온한 기억속에 자리잡은 뒤주속이 생각났었다.
내가 많이 무지해서 자신의 오류는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오만이 그 친구때문에 허물어지면서
누선을 건드렸던 것이다.
오랫동안 죽음이란, 뒤주보다 조금 더 좁은 관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가끔은 편안해지지만 또 어느때는 견딜수 없는 압박감에 진저리 친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예습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저 잠들듯 편안한 것이라고 다독일 밖에 없다.
삶이 지루해질수록 애써 그렇게 다둑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