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는 이야기

덕유산 향적봉에서 세상을 읽다

낮은담☆ 2008. 1. 28. 16:50

사실, 내가 겨울산을 올라본 기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껏 뻔질 거려봐야 동네 뒷산이나 오르는 정도였지만요.

 

그러니 최근에 올랐던 오대산이 겨울에 올라본 산 중에서 그중 높았지 뭡니까.

솔직히 산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제게는 별로 남아있질 않습니다.

 

개인화기를 제외한 40킬로그램의 군장을 지고  하루 평균 40~50킬로미터의 행군을

해야했던 그 시절의 악몽은 산만 바라봐도 두고두고 재발 되는 트라우마였으니까요.

 

왜 그렇게 바보같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즐기는 산행의 행복을 외면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산을 오르는 일이 조금씩 즐거워지게 되었습니다.

겨울산행도 기꺼이 할 수 있을만큼 산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겨울산행이야 말로 진수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바다로 떠나서 맞던 새해를 산에 올라 맞게 되고 바다를 보며 해대던 주절거림을

구름을 보며 하게 되었습니다

 

향적봉에 대한 설레임은 대단했습니다.

오대산의 비로봉을 밟아보기 전보다 더 설레었던 까닭은 물론 상고대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곤돌라에서 내려 바라본 세상은 별천지만 같았습니다.

싱싱하던 시절,  스케이트는 제법 탔었지만  스키를 이처럼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을만큼  이쪽은

내 분야가 아니었으니 신기하게만 보였던 거죠.

 

천천히 눈을 돌려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기대하던 상고대는 포근해진 날씨로 볼 수 없었지만 1.6킬로미터 위에서 바라보는 아랫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우리라는 생각을 미쳐 해보지 못했습니다.

 

 

바다를 넓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수평으로 바라보는 세상보다 훨씬 광활한 지평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운해가 펼쳐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대로 또 속이 트입니다.

우물안의 개구리.

논에 갇힌 우렁.

고치 속의 뻔데기였지 뭡니까. 제가요.

 

 

반백년을 살고난 뒤에야 겨우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많이 다른 또 한 부분을 보게 됐습니다.

손바닥만한 땅위에 살면서 우주의 중심에 서있던 양 거들먹거리던 시절이 스칩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얼어죽기 싫어서 두텁게 무장하고 제법 걸은 뒤에 상승한 체온탓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오만하고 철딱서니 없는 사고에서 겨우겨우 벗어나 겸손해져야 한다고

애써 자기 최면을 해대며 '이제라도 철 들어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했다니요.

내 생각을 누구도 들여다 보지 못하는 걸 알지만 후끈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멀리 , 설화가 마치 흰수염으로 보여 나무형상의 신선이 아닐까하는 만화같은 생각을 일순 품게했던

우뚝 솟은 주목 한 그루가 먼 곳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인파를 도인을 찾아온 순례자들로 생각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고 표정도 그리 엄숙해 보이지 않습니다.

 

 

수령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다른이들의 상상력을 빌려 천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나란히 서서 천년을 굽어봤겠죠?

때로는 근심도 많았을 겁니다.

 

인간들이 어쩌자고 말세를  재촉하는고.

그렇지.

다섯 명의 의인이 이 땅을 구해냈군.

아닌데. 저건 아니야.

오, 이번에도 간신히 방향을 제대로 잡았군.

당분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어.

 

두그루의 나무 속에는 그런 시름과 안도의 나이테들이 켜켜로 쌓여 있을 것 같았습니다.

 

 

 

참 밝은 햇살이었습니다.

너무 휘황해서  차마 바로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수액의 이동이 중단디었을 성 싶지만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나무였습니다.

 

지혜가 깊어질 수록 머리를 숙이는 법이라고, 많은 것을 갖고 싶으면 더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

법이라고 무릎을 내게 내어주신 할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곤 하셧습니다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음에도 죽기 전 언젠가는 그 뜻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쓸데없는 가지 다 털어내고 몇 남지 않은 굵은 가지조차 온전한 끝이 남지 않았지만 의연하고

장엄해 보였습니다.

 

아, 쓸모없는 것들을 저렇게 버려서 이토록 오랜 세월을, 죽어서도 당당할 수 있구나.

잔가지 하나에 애착을 갖었더라면 아마도 폭풍에 허리가 두동강이 나버렸겠지...

 

 

그렇습니다.

하산길에 실제로 그런 나무를 목격하게 되니까요.

 

 

 

장구한 세월 얼마나 많은 비와 구름이 지나갔을까요.

기나긴 세월 듣고 흘려보낸 소리는 얼마며 보고 지워버린 영상은 또 얼마일까요.

겨우 몇 분간 시선을 고정시킨 세속인인 내 머릿속에도 오만가지 상념들이 몇 번씩 부풀고 가라앉았는데 말이죠.

 

 

다시 또 바오밥 나무가 생각났습니다.

이 거목은 자신이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지구에는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을까요?

그래서 더 이상의 뿌리내림을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멈춰버린 것은 혹 아닐까요?

 

 

자기 살을 바람에게 조금씩 조금씩 내어주고 쇠락의 길을 가는듯 보입니다.

마는, 죽어 천년을 완성하기 위한 행보가 아닐까요?

 

바람에 실린 자기 살은 우주를 떠돌며 우주를 끌어안고 있을 것입니다.

미미한 존재인 인간조차도 혜안을 얻으면 스스로 우주가 된다는데 하물며 천년고목이 말입니다.

 

 

독수리처럼 먼 곳을 보며 외치는듯합니다.

보라, 내 비록 심장까지 다 버렸지만 너희는 마땅히 나에게서 두려움을 가져야 옳지 않겠느냐고.

 

나에게서 천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연이 위대 해서가 아니냐고.

자연을 창조한 조물주의 섭리는 또 어떠냐고...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나무가 말합니다.

나도 버리렵니다.

더 많이 비우고 더 많이  버리렵니다.

오래 두고 저 아랫 세상을 지켜보렵니다.

 

 

하산 길입니다.

두툼한 눈으로 감춰버렸던 길을 사람들이 익숙하게 찾아냈습니다. 

 

오늘 하루만해도 1600고지의 높은 산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시정의 인파처럼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간 길입니다.

그들이 정확한 방향을 알고  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다니던 길을 기억해 두고 회귀하는 동물이니 자기가 왔던 길로 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길이 가끔은 이렇게 장애물 뒤로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애물이 오히려 고마울 수도 있습니다.

더디지만, 힘들지만, 헤쳐 나갈 수는 있기때문입니다.

 버리고 낮추면서 성숙해질 수 있어서 입니다.

 

 

종종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오른쪽?

왼쪽?

 

선택은 내 자신의 몫이고

결과도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곧은 길이 보입니다.

옳은 선택의 결과겠죠. 

 

참 간단한 진리를 이제 깨우칩니다.

아니죠.

알고 있었으면서도 절실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반추에 성공했으니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저런 지표 하나쯤은 다시 세워야겠다는 다짐입니다.

굵은 기둥이 가르키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다짐입니다.

 

그리 생각하노라니 가지의 끝이 천상에 걸린듯 합니다.

 저 끝에 올라 손을  내밀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고 천상의 그곳이 바로 닿을 것만 같습니다.

 

 

 

결국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실입니다.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치 득도를 했던듯한 생각은 역시 착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이 허허롭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외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종일 행복했었으니까요.

 

2008년 1월 26일 밝은 시간에 저는 덕유산 향적봉과 설천봉을 지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