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는 이야기

비로봉을 밟다

낮은담☆ 2007. 12. 31. 12:44

12월 29일 / 오대산 비로봉을 다녀오다.

상원사 - 비로봉 - 상왕봉 -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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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고통까지도 추억으로 반추시키는 마력이 있다.

무릎까지 쌓인 눈밭에서 길을 잃고 악전고투하던 30여 년 전 기억도.

중부지방에서는 보기드문 폭설로 밤새 허무하게 지붕이 주저 앉아버린 축사에 깔려 동사한, 갓 이유시킨 

100여마리의 새끼돼지를 주어 담으며 망연했던 기억까지도.

 

오대산, 비로봉, 눈꽃이라는 세 개의 낱말은 좀처럼 반추될 것 같지 않던 어린 날의  기억까지 헤집어 놓았던터라 들떠 있기는 벌써 사나흘 전부터 였다.

도시락과 커피를 챙기고 나선 골목길은 제법 매운 바람에 실린 빗방울이 후두둑거린다.

 

쏟아져라, 눈이되어 펑펑 쏟아져라.

벗겨진 어둠에서 드러난  하늘을 향해 궁시렁거리지만 기돗발은 서지 않는다.

 

 

설경이 맞아줄 거라 기대했던 상원사는 칙칙한 하늘만큼 을씨년스러웠다.

희미하게 보이는 먼산의 눈꽃이 작은 위안이다.

말하자면, 높아지는 고도에 비례해 펼쳐질 비경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레 흥을 꺾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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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녀에 매달린 작은등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나를 잡아당기면서 서서히 오대산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가파른 계단 위로 적멸보궁의 지붕이 보였지만 이미 펼쳐지기 시작한 설경은 내 시선을 빼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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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풍경을 좋아한다.
온몸을 뒤틀리게 하는 거센 풍상에 구부러지거나 세월의 인고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를 보듬어주고 있는  햇살이 만들어주는 실루엣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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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게 굽은 가지와 몸통에서 긴 삶의 여정을 헤쳐온 노인의 깊은 주름살을 읽는다.

얼핏 아름다움에서 멀어진 것 같지만 소중한 삶처럼 깊은 연륜을 읽으며 옷깃을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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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인 손자를 지켜보는 등굽은 할머니, 또는  세상을 향해 담백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서히 말라가는, 삶에 초연해진 노인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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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올라서면 또 다른 정상이 보인다.

삶의 정상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은 또 다른 성공에 목마르게 된다.

그래서 내가 밟아보지 못한 정상은  동경의 땅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가시거리 안의 아름다움이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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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세월의 흔적을 담고 싶은 걸까?

죽어서 천년, 살아서 천년.

너무도 진부한 표현이지만 주목을 말할 때 달리 표현할 말이 따로 없다.

 

도심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어린 주목은 고만 고만한 정원수일 뿐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다.

숀 코넬리라는 배우를 닮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호색한의 느끼함으로 버무려졌던 젊은 배우가 더 록(니콜라스 게이지와 공연했던 영화)에서

무섭게 눈부시고 우아한 노인의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내 늙은 뒤의 얼굴에서는 도무지

 읽혀질 수 없을 그이의 변신은  충격이었다.

 

한동안 내 발을 묶어 버린 두 그루의 주목은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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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고 휜 나무를 못생긴 나무로 치부한 이가 있었다.

곧은 굵은 나무만 동량으로써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했던가?

 

아름다운 나무였다.

선두와 꽤 긴 거리가 생긴 탓에 몇 컷쯤 더 차근하게 담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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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되어준 파란하늘과도 잘 어울리는 듬성한 가지위에에 피어오른 눈꽃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스칠 때, 미세했지만 흐트러지던 눈꽃이 안타까웠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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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봉을 내려오며 만난 가장 기억에 남는 광경이다.

먼산에 내리쬐는 오후 햇살의 색온도는  벌써 석양을 느끼게 했다.

문득 어린왕자가 떠올랐고 부지런히 넘긴 기억의 책장 사이로 '바오밥'이라는 활자가 클로즈 업 된다.

 

스무 살 남짓하던 나이일 때 깊숙히도 빠져들어 이백 번은 족히 읽었던 어린왕자.

바오밥 나무는 어린왕자의 별에 치명적인 위협의 존재로 묘사됐지만  이 나무 앞쪽으로 돌아가면

해지는 걸  지켜보려는  어린왕자가 슬픈 눈을 하고 기대어 있을 것 같았다.

 

 

선두와 제법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칼바람을 안고서 혼자서 한 시간 넘게  앞사람의 흔적을 더듬으며 종종걸음  해댔다.

연신 콧물을 닦아내느라 코끝이 아리고 귀가 얼얼하다. 

 

짙은 여운에 혼자서라도 다시 한 번 차근히 다녀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